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양 대화재 (문단 편집) == 결말 == 방화범을 추적한 결과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,[* 갇힌 자들은 대부분 [[함경도]] [[북청군|북청(北靑)]]·[[길주군|길주(吉州)]]·[[영흥군|영흥(永興)]] 출신이었다.] 당사자들은 모두 극형인 [[능지형]]에 처해졌으며, 가족들까지 [[연좌제|연좌가 되어]] 남자들은 [[교형]]에 처해지고 처와 딸은 [[노비]]가 되었다. 조정에서는 이재민들에게 구호양곡과 장 300석을 나누어 주었고, 화재가 커지지 않도록 길을 넓히고 방화장(防火墻)을 쌓게 했으며, 개인집에도 5간, 10간마다 [[우물]]을 파도록 하고 종묘와 대궐 안, 종루의 누문에는 [[소화기]]를 비치하도록 했다.[* 그때 당시 소화기는 [[대포]]에 [[바퀴(도구)|바퀴]]가 달린 모양이였다.]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병조 예하에 [[금화도감]]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화재를 예방하게 하였다. 이 금화도감은 오늘날의 [[소방서]]와 같은 역할로,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소방기관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